성결 체험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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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여정
신성철 2012-10-14 추천 0 댓글 0 조회 870

                 나의 신앙여정(旅程)


                                      김 용 련 목사
* 고 김용련 목사님은 반석성결교회 원로목사님으로서 일평생 성결의 복음을 위해 그야말로 활화산 같은 전도의 열정으로 성결의 복음을 전하시다가 2009년 11월 28일 90세의 일기로 천국에 입성하신 성결의 사람이시다.


1. 십전(十錢)짜리 영어성경과 十全의 온전한 구원

1940년대 초엽 나는 평북 태천읍 감리교회에 출석했다. 그 교회의 주임 조영제 목사님 내외분은 매우 친절하셨는데, 어느 날 조 목사님은 런던에서 출판된 10전짜리 신약 영어성경(홈정역)한 권을 나에게 주셨다.


  그 작은 성경이 나에게는 너무 소중해서 명주 보자기에 싸서 허리띠에 매달고 다니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군경들이 권총을 차는 것과도 같았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는 밖에 풀어놓고 나와서는 다시 메고 다녔다. 1943년경 초가을, 나는 명산 향적산 양화사(陽和寺) 소속의 조그만 암자를 찾아가 거기서 10전짜리 영어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는데 요한복음 제 일장에서 부터였다.


  그 당시에는 영한사전이 없어서 영일 사전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부지런히 번역하던 중 두 달 쯤 걸려서 요한복음 번역을 마쳤다. 어려운 부분은 일어성경을 참고하곤 하였다. 일제치하 기독교가 크게 핍박받는 시절인지라, 우리말 성경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읽을 때는 동일한 어휘들이 반복되는 지라 번역하는데 편리한 점도 있었다.


  얼마 후에 조 목사님께서 이번에는 신구약 합본의 영어 성경을 주셨는데, 그 큰 성경은 책상 위에 놓아두었으나, 10전짜리 영어 성경만은 언제나 내 허리에 지나고 다녔다.


  비록 내 기억력이 둔한 편이지만 은혜스럽다고 느껴지는 영문 성귀들을 암
송해 봤다. 산상 보훈의 부분들, 로마서 8장 마지막 부분, 고린도전서 13장, 요한일서2장의 일부분, 구약시편23편 등등을 암송했다. 그런데, 20대 청년기에 암송했던 성귀들이 70대 노령기에 까지 부분적이나마 기억에 남아 있으니, 주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10대 소년기에 조부모님에게 배운 한문(주희 小學)에 관한 기억은 20대에 암송한 성귀보다 더 선명한 듯하니 신기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마 인체의 지능 구조를 그렇게 지으신 모양이다.


  재미있는 옛 이야기지만 나는 소년시절 조부님 슬하에서 우리집 종의 아들(장원보)와 같이 한문을 배웠다. 공부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오늘 배운 한문을 내일 아침(훈장)님 앞에서 암송해 바치는 것이다. 그런데, 종의 아들 장원보군은 나보다 월등하게 잘했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생각과 부끄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차라리 그때 내가 종아리를 맞았더라면......


  나는 젊은이들에게 어학을 공부하라고 권하고 싶다. 어린 시절일수록 효과가 크다고 나는 믿는다. 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어학 공부는 힘들어지고 효과도 적을 것이다.


  申四勳 박사님은 어학도들에게 "엉어 잘하기를 원하는가? 영어 성경을 읽으라! 독일어 잘하기를 원하는가? 독일어 성경을 읽으라..." 고 기록했다.

1947년 4월 나는 死線 38도선을 넘어 월남했다. 몸에 성경 더구나 영어 성경을 지니는 것은 일대 모험인줄 알았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10전짜리 영어성경을 차고 그 사선을 돌파했다. 우리 주 예수님의 도우심이다. 동해주 앞바다에서 야간에 38선을 넘는 순간 감격의 찬미를 배위에서 불렀다: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 받기를 원하네..."


  1947년 5월 15일 10전짜리 영어 성경을 오른손에 들고 나는 경기도 여주 농업중고등학교 영어 교사가 됐는데 넓직한 사택을 주어서 고마웠다. 거기서 나는 실력있는 영어 교사로서 또한 예수 잘 믿는 인격자라는 칭찬을 아울러 들었다.


  그러나, 그 10전짜리 영어 성경은 나를 무섭게 책망했으며 양심의 가책은 날로 고통스러워졌다. 나는 거짓말 이력서로 남을 속였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교장을 속이고 경기도 지사 구자옥씨, 문교부장관 안호상씨도 다 속일 수 있었으나 나를 고발하는 내 양심만은 속일 수 없었다. "동경 상지대학 문과 예과를 수료했음" 이것은 전적으로 거짓말이다.


  1948년 여름 어느 날, 나는 그 곳의 감리교회 이철상 목사님을 찾아가 사실을 자복하고 눈물로 회개함으로써 예수님의 속죄(贖罪) 대속을 믿게 됐다. 또 성령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해 주셨다(롬8:16). 그 증거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후에 새로 부임한 교장(유석준)님께 사실을 자백하고 남녀 학생들에게도 공개 사과(눈물로)하였다. 그러한 일로 말미암았는지 그 무렵 예수 믿기를 결심한 학생들도 적지 않았으며 후일에 성직자로 헌신한 자도 많다 할렐루야!

1947년 성탄절을 나는 원주군 문막 감리교회에서 가졌다. 고향 출신 박재원 전도사님이 그 곳에 시무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성탄 다음날인가(?) 원주읍을 찾아가 감리교 선교사인 도익서(C.Stocks) 박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젊은 사람으로서 대머리였는데 우리말을 정확히 발음하는 선교사님으로 처음 만난 분인데도 우리말로 대화하는 중 예수님을 만난 듯 감미(甘美)로웠다.


  그는 영어로 짧은 기도를 올렸다. "make us one- 우리를 하나로 삼아 주소서" 나는 지금도 요17:21-23을 봉독할 때는 도박사님의 그 기도를 회상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까지도 거짓말을 했다.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일본에서 외국어학교를 나왔노라고 거짓말 대답을 했다. 이력서를 속이게 되니까 연쇄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된다. 가련하다! 불쌍한 인생이다!


  작별할 때 도박사는 나에게 미국어 성경 RSV 한 권을 주었다. 나는 그 성경을 최소한 수 십 번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무도 형식적으로 그것을 통독했음을 솔직하게 자복해야겠다. 그저 읽는 일 자체가 목적인 마치 수박 겉핥기식이다. 한문에서는 그런 경우를 '書自書我自我' 라고 한다.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 란 뜻이다. 그 점에서 누구나 나와 같지 않기를 바란다.


   1950년대 말엽 선명회 창설자 B.피얼스(Pierce) 박사님의 희생적 노력으로 전국교역자(초교파적) 수양대회가 연차적으로 열리곤 했다. 어느 해 가을 영락교회 예배당에서 그 대회가 있었는데 도익서 박사님의 부친 도마련 선교사가 특별 강사로 내한했다.


  나는 그 노종(老從)과 시간을 약속하고 만난 자리에서 "아드님 도익서 박사님에게 1947년 말에 내가 뜻 아닌 거짓말을 했어요"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 늙은 종은 나에게 훌륭한 상담자가 되어 주셨다.


  1948년 어느 날 나는 한강 가 시원한 호텔에서 그곳을 지나가는 한 미군 청년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는 호감을 보이면서 "10일 후에 이곳을 다시 지나 갈텐데 기독교 서적을 가져다주마"하고 말했지만 그의 약속이 잘 믿어지질 않아서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약 10일 후 학교 교정에서 테니스에 열중하고 있는데 감리교회에서 급한 통지가 날아왔다. -어느 미군 병사가 세 박스의 서책을 맡기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첫 상자에는 미군용 포켓성경(신약과 시편 잠언을 합한), 둘째 상자에는 미국에서 인쇄된 한글 전도지, 셋째 상자에는 전도용 각종 소책자로 가득 차 있었다. 포켓용 성경은 참으로 탐스러웠다.


  책을 펴면 첫 면에 미국 성조기의 기름이 원색으로 나오고 그 밑에 잠언 14:34절 성귀가 영문으로 쓰여져 있고 Franklin Roosebelt의 서명이 있다. 그날에 10전짜리 영어 성경은 발전적으로 갱신되었다.


  각종 소책자들 중 뉴질랜드 사람 R. A. laidlaw가 쓴 "The reason Why"를 뽑아서 곧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신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서울신학교 일학년 때(1951) "어째서"란 책명으로 400부를 등사했고, 1957년에는 1,000부를 인쇄 출판했다. 내가 번역함으로 그 책은 30나라 국어로 세상에 알려진 알찬 내용의 소책자이다. 그것은 나의 처녀작이다. 주님께 영광 영광!


2. 6.25와 나

  1950년 6.25는 적화통일을 목적한 김일성이 불법남침한 날이다. 그 날이 주일날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41.12.8일 일본의 군국주의자 東條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것도 주일날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UN 15개국의 경찰병력이 우리나라를 돕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우리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UN군을 동원한 배후에는 여호와 이레의 손이 계셨다고 우리는 확신하는 바이다.


  7월 5일 나에게 두렵고 떨리는 날이요 시련의 날이요 야곱의 환난 날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종일 비가 내렸다. 여주읍에서 20리 떨어진 항거리 마을에 더 이상 유할 수가 없으므로 불가불 여주읍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이른 아침에 학생 방종만군이 나를 찾아와 "선생님 절대로 성경책을 몸에 지니지 마셔요. 위험합니다." 라고 경고해주었다. 나는 그 제자의 순정 때문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주님의 은혜로 다음과 같은 결단을 내렸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 일지도 모른다.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죽자"는 일사 각오를 다짐한 것이다. 2권의 영어 성경과 찬송가, 모두 3권을 보자기에 잘 싸서 내 짐 속에 넣었다. 여주읍으로 들어가는 도중 나는 인민군에게 검문을 받았다.

짐 속에서 3권의 책이 나타나자 다발총을 든 자그마한 함경도 사투리의 인민군이 나에게 물었다.


"예수를 믿는가?"

"그렇다"

"과학시대의 청년에게 무슨 신앙생활이 필요한가?" "직업이 무엇인가"

"학교 교사다"

"무엇을 가르치는가?"

"물리학과 영어를 가르친다"


  그러나 물리학을 가르친다는 말은 거짓말인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유리할 것이라는 마귀의 속임수에 내가 말려들어 갔던 것이다. 그런 경우 우리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악한 자)에서 구하옵소서- 이 절요(切要)된다.


  7월10일 오후 2시반경 UN군은 여주읍을 처음으로 폭격했다. 폭탄이 예배당 정문앞에 떨어졌기 때문에 예배당과 목사 주택이 순식간에 없어졌다. 그 때에 나는 노인 여전도사 박 미염 할머니 방에서 홀로 누어 번역문 원고를 읽고 있었다. 그 건물도 폭풍 때문에 진동은 대단했으나 쓰리지진 않았다.


  그 당시에는 몰랐으나 후일에 깨달은 것은 어미닭이 새끼 날개 아래 품듯이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셨다는 것이다. 그날 황혼에 여주읍을 떠나 내 가족과 곽 순동군 일행은 단현리 감리교회 林斗鉉 長老님 댁으로 옮겨갔다.


  가는 도중 나는 집사람에게 조용히 어젯밤에 꾼 꿈을 이야기했다. "내 고향 큰 배나무와 고목(수 백 년 수령) 밤나무가 있는 동산 그 곳에 나는 빈손으로 서 있고 골리앗 같은 스탈린이 나 앞에서 내게 권총을 겨누고 서 있다. 눈을 들어 서편을 보니 수 백 미터 거리에 작업복을 입은 미군 4-5명이 나를 도와주려고 오고 있다. 고맙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권총은 눈앞에 있었고 방아쇠도 당기기만 하면 끝장날 그 순간 그 찰나 나는 침착한 태도로 무엇인가를 발성했다.


  그러자, 그 소리는 순간적으로 좌우에 날선 칼날로 변하더니 신속히 날아가 스탈린의 목을 잘랐다. 피 한 방울 없이 그 골리앗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꿈이다. 그것은 무슨 신령한 영적 체험도 아니고 무슨 계시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꿈일 뿐이다. 극도로 의기소침한 처지에 있는 김 용련이가 꾼 하나의 꿈이다. 오해가 없어야 한다.


  지금도 히브리 4: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을 봉독할 때마다 그 꿈을 회상하곤 한다.


3. 서울신학교 시절

  1951년 부산시 동래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중 9월 달에 나는 그곳에서 개학된 서울신학교에 입학했다. 교실은 금정산 기슭에 위치한 판자교사(바라크)였으나 사명을 받은 훌륭한 남녀학생들이 전국에서 모여 수양을 받았다.


  이미 거듭난 심령들은 제 2의 은혜 곧 성결의 은혜를 받아야 승리의 삶을 갖게 되는 법인데, 그 복된 성서적 교리를 가르쳐 주시는 교수님들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롬6:6, 11, 22등 성귀가 명확히 문법적으로 교리적으로 설명되고 강조되어야 할 것인데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했다.


  외국의 성결학자와 대가들이 연차적으로 다녀갔지만 그 보배로운 성결교리가 잘 전달된 것 같지 않았다. 이명직교장님의 디도서 2:11-14에 근거한 성결설교, 김응조교수님의 행19:1-7에 근거한 성령세례의 설교는 감동적이었으나 나는 그 은혜를 구하지 않고 따라서 받지도 못했다. 성결의 은혜를 모른 채 1955년 3월에 나는 서울신학교를 서울에서 졸업했다.


4. 목회생활의 시작

  신학교를 졸업하자 부산에 있는 수정동 성결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열심히 심방하고 열심히 설교했다. 그러나, 그 설교는 언제나 요3:16의 설교이지 눅3:16의 설교는 아니었다. 애석타! 그 귀한 수 백 명 심령들에게 성령세례로 인한 성결은혜를 가르쳤다면 이단자(박태선, 노광동) 들의 바람이 불어도 견고히 서서 흔들림이 없었을텐데...


  1956 6. 23 나는 이명직 목사님의 소개로 충남 부여 규암면 규암성결교회로 전임했다. 자동차가 백마강가에 이르러 하차하자 수 십 명 신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 중에 나이 많은 허명갑 집사님이 "아마 도지사가 오셔도 이런 환영을 못 받을 것입니다"고 말하면서 반겨 주었다.


  그 분들이 그처럼 부드럽고, 순진하고, 진실하고 그리고 사랑이 많았다. 유력한 전임 교역자 박종만 목사님이 시무한 교회인지라 부여군 내에서 제일 큰 성전으로 건립되었으며 신도들도 많았다. 1910년대에 이명직 목사님이 창립한 교회로서 충성된 남녀종들이 지나간 규암성결교회이다.


  반면이 그곳은 카톨릭교회 세력이 대단한 지역으로서 유력한 신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36세의 청년 김용련 전도사가 중책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그 심령들의 발은 옥토요 문전옥답이다. 심는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부지런히 심방하고 진실히 기도하고 열심히 설교했다. 거듭나서 새 사람 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애석하다! 나는 한 번도 성결에 대해서 설교하지 못했다. 그 옥토밭에 성결의 씨를 심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남녀 중고등학교 전도, 부여 경찰서 직원 전도(경목 제도가 있기 전) 유치장 전도, 시장과 노방 전도, 유선방송 전도, 문서번역출판 전도, 영어성경반 강의, 부흥회 전도, 그리고 개인전도... 피곤도 권태도 모르고 열심히 전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요3:16절의 설교이지 롬6장의 설교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는 중 나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교단의 어른들도 칭찬해 주셨다.

그러나, 나는 성결을 모르는 성결교회 목사가 아닌가! 엄밀히 말해서 실격자이다.


  1970년 8월 13일에 규암교회를 떠난 지 6년 후, 1976년 11월 19일에는 그 교회에 다섯 분 장로님의 장립식이 있었다. 나는 그 자리를 빌려서 회중에게 진실한 맘으로 정중히 공개 사과를 했다. "14년 동안이나 본 교회를 섬기면서 성결복음을 가르치지 못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히브리서 12:14절 하반절을 정확히 번역하면 "... 성결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이다.


5. 五十세의 만학

  1970년 8월 15일 50세가 되는 늙은 학생이 성결을 배우려고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옛날 공자는 五十에 天命을 안다고 했는데 나는 50에 성결을 체득하러 캔저스 성서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은 성서적인 성결을 가르치며, 또 성별된 실제생활을 강조하는 학교로서 TV를 안보며, 세속적인 일들을 멀리하는 대학이었다.


  교수님들의 가르침도 좋으나 그들의 실제생활에서 배우는 바는 더욱 컸으며, Dale. M. Yocum박사에게 습득(習得)한 바는 매우 크다. 20대 청년기에 나는 10전짜리 영어성경을 선물 받고 기뻐했는데 50세에는 그 성서 대학에서 十全구원 곧 온전한 구원(히6:1-Perfection)을 선물로 받고 주님께 감사했다.


  여기서 말하는 온전(Perfection)이란 용어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온전은 하나님의 온전이 아니며 천사의 온전도 아니고 범죄 이전, 아담의 온전도 아니며 예수 재림 후에 성도가 가지게 될 그 온전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인의 온전(Christian Perfection)을 말하며 온전한 사랑(Perfet Love)(요일 4:17-18)을 의미한다.


  중생 은혜는 회개와 신앙으로, 성결은혜는 온전한 헌신(마23:19)과 믿음으로 받게 된다(행15:9). 이것은 간명한 공식이다. 이는 곧 성서적 방법이다.

헬라어 시제를 공부하는 일이 중생과 성결의 교리를 정확히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임을 나는 거기서 배우게 됐다. 그래서, 후일(1978년)에 나는 다니엘 Steele의 '성결과 헬라어 시제'를 번역 출판했다.


  중생의 경험이 중요하나 성결의 은혜는 더욱 귀중하다. 그러나, 주 예수님과 이야기하면서 빛 가운데를 행하는 일(walking)은 가장 중요하다. 전기적인 경험보다 하루하루의 삶이 더욱 중요하단 말이다. 결혼식도 중요하지만 결혼생활은 더욱 중요하다. 무슨 체험을 했노라고 자랑하는 자는 고린도 교인처럼 어린 사람, 철없는 사람이다.


"성결인에게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롬6:22절은 성결의 전기적 경험(부정 과거)과 승리로운 일상생활(현재 시제)를 일목요연하게 말해 주는 성결의 요절이라 하겠다.


  1976 .3. 1 삼일절 밤 나는 연탄가스의 치명적 강타로 인해서 사경을 헤매이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를 건져주셨다.


  그때부터 나는 미력하나마 문서 선교에 힘쓰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고결한 인격자들과 알게 되었으며 최고의 지성들과 교제할 기회도 가지게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로다. "웨슬레 神學源流"의 저자 W. M. Greathouse 박사가 주신 다음과 같은 격려는 언제나 나에게 힘이 된다: "우리가 죽은 후에라도 우리가 기록한 서책은 오랫동안 살아서 말해 줄 것이다..."


  서적들을 번역할 때마다 내 이해력이 부족해서 언제나 저자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한 나는 우리말 문법에도 무식하고 표현력에 있어서도 부족하다. 그렇지만 내 가족들이 기쁨으로 도와주니 그저 고맙기만 하다.


  1985년 와일리의 신학개론이 선교 100주년 기념으로 번역 출판되었을 때 손택구 목사님이 크리스천지에 추천된 글을 써 주셨고, 서울신대 조종남 박사님과 교수님들이 그 대학과 대학원의 교재로 이 책을 채택해 주셔서 참으로 고마웠다. 지금까지 총 4500권이 인쇄된 중에 태반이 기성교단으로 흘러들어 갔으나, 내가 속한 예성교단에서 그 책이 경원 당하고 있으니 마음이 심히 아프다.

   자기의 주소를 모르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며 또한 위험한 일이라 하겠다.

1991. 5. 22에 일본 목사님 쯔다다 마코토 박사가 자기 선친의 저서 "성결의 생애"의 출판 기념식에 참석차 서울을 다녀갔다. 일본의 성결파 단체들은 단결 합심해서 문서출판에 힘쓰는 중 지금까지 60여권의 서책이 출판됐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때에 부끄러워 머리를 들 수가 없다.


  1986년 가을에 미국 나사렛교단 국제출판국장 T. Duddney 박사가 내한했다. 그는 한국 나사렛 교단과 기성, 예성 3교단이 협력해서 문서출판을 시작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제안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 막중한 사업을 위해서 우리 땅에 제 2의 이사야가 나올 수는 없을까?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사6:8)라고 하면서...

1978년 정초 신촌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무리를 보다가 나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전도물을 써 보았다.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그 해 3월말에 3만장을 석판으로 인쇄해서 주께서 힘주시는 대로 서울 시내 13개 남. 녀 대학교를 방문했다. 초대를 받은 것이 아니고, 교문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배포하는 전도방법이다. 그 해 3월 15일 아침에는 봉천동 서울대학교 정문 앞에서 한복차림으로 털모자를 쓰고, 1000장을 배포했다. 그 다음 날 한 장의 정성어린 편지를 서울대 신입생으로부터 받고 주님께 감사드렸다. 심령문제에 대한 상담을 요청하는 진지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1991년 9월 말부터 약 두 달 동안 주님께서는 나에게 남방 선교를 위한 길을 열어주셨다(행16:9). 호주 서부의 Perth에 있는 한국인 성결교회에서 무익한 종을 초청해 주신 것이다.


  그 곳 교회에서 열심히 성결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영광스런 특권이었으며, 또 다국어로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전도하는 일은 즐겁고 기쁜 일이었다. 특히 그곳 장로님(송인흠) 내외의 삶을 통해서 받은바 교훈은 매우 컸다. 시드니 성결교회 강 현성 목사님의 후의에 감사드린다.


  지난 1970년대 초엽에는 동방 미국에서 수양 받으면서 전도했고, 1973년 6월에는 서방 베들레헴에서 노방 전도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일도 있었다. 나를 심문하던 형사 이름은 요르단(Jordan)이라던가.


  1991년 가을에는 남방 대양주선교, 이 모든 것이 우리 주님의 은혜로다. 이제는 주님께서 나를 북방으로 인도해 주시길 기도드린다. 1947년 4월 살벌한 내 고향을 떠날 때는 죽어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몇 번이나 맹세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 고향이 그리워진다. 어느 외국 작가가 말했듯이 이지적 판단에서도 아니고, 공리적(功利的) 견지에서도 아니고, 그저 고향이 더욱 그리워진다.


  우리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면, 평양 대동강 다리에서 서서 오가는 시민들에게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의 전도문을 배포하고 싶다. 평양역전과 모란봉 공원에서 노방 전도를 해야겠다.


  내 고향 태천(泰川) 그 곳을 찾아가 무너진 제단-거기서 안병준 목사님이 피흘려 순교하셨다는데- 을 다시 쌓아야겠다.


  1947년에 성전 건축헌금 7만원을 약속만하고 월남해 버린 것이 바로 내가 아니었던가? 그 밤나무, 배나무 동산을 구입해서 그 터 위에 성결복음을 전파하며 가르치는 성전을 세워야겠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종자"라고 했다는데, 주님!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조국 삼천리강산이 되게 해 주소서!(시8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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